정말 오랫만에 영화 관련 글을 쓴다. 올해는 영화관에서 세 편의 영화를 보았다. 다 재미있어서 행복했다. 티켓 값이 엄청나게 올라버려서 이제는 영화를 가볍게 보고 나오는 것이 어려워졌다.
봄에 범죄도시 2를 보고 코로나 시국의 답답함을 통쾌하게 날릴 수 있었다. 조금 지나서 한산을 보고 압도적인 승리를 통한 국뽕을 제대로 느꼈다. 그리고 탑건 매버릭을 통해 잠시 내 마음을 가득 채운 국뽕을 미국뽕으로 바꾸었다.
한산을 보고 명량이 별로라고 느껴졌다. 처음에도 명량을 감명깊게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산을 보고 OCN에서 방영해주는 명량을 본 순간, 아무리 일본을 까면 흥행에 성공한다지만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째, 명량도 그렇고 한산도 그렇고 조선군의 수장 이순신 장군과 일본군의 수장의 무게감에 따라서 영화가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이 관점에서 봤을 때 명량보다는 한산이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물론 최민식 배우가 연기한 이순신도 훌륭하다. 하지만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7년을 구르고 나라를 구했건만 정치적인 이유로 백의 종군을 하고, 어머니를 여의고, 평소 극도로 예민하고 소화불량에 시달린 장군이라고 하기에는 얼굴이 너무 크다(죄송합니다...).
악역이라고 할수 있는, 류승룡이 연기한 구루지마 미치후사도 변요한이 연기한 와키자카 야스하루에 비해 너무 별로다. 기억나는 장면이라곤 패배가 확정된 상황에서 칼을 들고 달려들며 "리~슌~싄~"을 외치다가 목이 날아가는 장면 밖에 없다. 이순신 장군이 직접 칼로 적장의 목을 베는 것도 웃기다. 지금으로 치면 해군참모총장 급 제독이 전투에서 직접...
조연들도 이상하다. 극중 이순신의 아들 이회가 백성들과 함께 산 위에서 전투 광경을 내려다보며 짓는 "급박한 표정 얼굴 클로즈업"은 도대체 몇 번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마지막 30분 동안은 무려 다섯번은 넘게 나오는 것 같던데. 소리를 거슬리게 꽥꽥 지르며 치맛자락을 흔들어대는 이정현(극중 이름도 기억안난다)과 스파이로 나오는 진구 서사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백성들의 시점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나는 담백하게 승리를 위해 집중하는 장군의 모습, 전투 전 첩보전을 숨막히게 그려낸 한산의 분위기가 훨씬 좋았다.
둘째, 감동을 위해 현실성은 무시하고, 국뽕을 주입한다. 바다 위의 요새라고 불리는 판옥선도 못 버틸 정도의 회오리 바다에서 어민들이 쪽배를 타고 끌어내는 장면에서는 실소가 나왔다. 어민들이 낚시배에 군사용 갈고리는 도대체 왜 소지하고 있지? 그리고 거리가 그렇게 먼데 어떻게 판옥선에 던져서 걸었지? 어민들 맞나?
그리고 대망의 하이라이트, "우리 후손들이 우리가 이렇게 ㅈ빠지게 고생한거 기억은 할라나?" / "아, 그거 기억 못하면 아주 개 호로색기들이제~ 아암~" 하는 엔딩 부분의 강제 반일 국뽕 주입 장면에서는 차마 견디지 못하고 그냥 TV를 꺼버렸다.
명량도 상업영화로서는 나쁘지는 않지만 한산이 개봉함으로서 명량의 단점이 극도로 부각되는 부작용이 드러난 것 같다. 명량, 그리고 최민식이 연기한 이순신하면 떠오르는 느낌은 기적, 감성, 감동, 정성 등의 뭔가 따뜻한 웜톤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반면 한산과 박해일이 연기한 이순신은 철저, 냉철, 전략, 인내와 같은 뭔가 더 잿빛의 전쟁과 유사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물론 실제로 명량해전은 희망이 없던 상황에서 말 그대로 하늘이 정성에 감동해 기적을 선사한 전투이다. 이순신 장군도 명량해전 후 난중일기에 "실로 천행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한산도 대첩은 명량해전과는 다르게 철저하게 전략을 짜고 인내하여 적군을 궤멸시킨 전투라 어느 정도는 그 결을 따라가는게 맞긴 하다.
하지만 천 명이 영화를 봤다면 천 가지의 감상평이 있는 법이다. 나는 한산의 담백한 분위기와 연출이 너무 좋았다. 박해일의 이순신 장군은 대사량이 정말 적다. 놀라울 정도로. 그저 냉철하고 차갑다. 차분히 인내하고 기회를 기다리다가 깔끔하게 승리를 쟁취한다. 물론 이순신 장군을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아마 실제로도 저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다. 그리고 예고편이나 포스터에서 등장하지 않았던 손현주, 안성기와 같은 중견급 배우들이 조연으로 활약한 것도 예상 못한 묵직함을 실어주어서 좋았다(포스터에 서사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 온갖 인물들을 중구난방으로 처박아놔서 망한 외계+인과 상당히 비교된다).
이순신 소재의 창작물은 한국에서 치트키가 될 수 밖에 없다. 11월에 개봉하는 노량도 극장에서 볼 예정이다. 왜 배우들이 이순신 배역을 조심스러워 하는지 알 것 같다. 당장 영화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 사람인 나조차도 박해일의 이순신을 보고는 최민식의 이순신을 까고 있지 않은가. 배우 입장에서 얼마나 부담될까. 아무튼 11월에 개봉할 노량이 이순신 3부작의 유종의 미를 거두기를 기대해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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