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 1917
1917이라는 영화를 처음 알게 된 계기는 기생충의 아카데미상 경쟁작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이다. 물론 그때는 그냥 들어 넘기기만 했고 챙겨봐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사실 아카데미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나에게는 그닥 와닿지 않았고 그저 흥행이 잘 되고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재미있는 영화가 좋았으니까.
2020년에 국내 극장 개봉을 했지만 저 때는 한창 코로나가 극성일 시기라 극장에 가서 볼 생각은 따로 하지 않았다. 이 영화를 최근에 넷플릭스를 통해 보게 된 계기는 썬킴의 거침없는 세계사라는 책을 읽어서이다.
역사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지루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역사를 읽기 쉽게 서술해 둔 책들을 정말 좋아하는데 이 책이 딱 그랬다. 책에 대한 후기는 따로 작성하도록 하겠다.
나는 1차 세계대전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어느 정도는 비슷하리라 생각된다. 문학 작품이나 영상 작품들을 봐도 2차 세계대전은 덩케르크, 라이언 일병 구하기, 콜 오브 듀티, 밴드 오브 브라더스 등등 많은 미디어가 존재하지만 1차 세계 대전은 그렇지 않다. 실제로 전쟁 과정에서도 덩케르크 철수 작전, 노르망디 상륙 작전, 진주만 공습, 히로시마/나가사키 핵 투하 등 굵직하고 흥미가 갈 법한 이벤트는 2차 세계대전쪽에 쏠려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도 2차 세계대전에 못지 않게 끔찍한 전쟁이다. 1차 세계대전은 대부분 참호전이라는 방식의 전투를 했는데, 말 그대로 길게 참호를 파고 낮이 되면 진지와 진지 사이의 무인지대를 돌격하고, 밤에는 진지로 돌아와 개인 정비를 하는 미친짓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땅 몇평을 차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 과정에서 병사들은 정신병에 걸리기 일쑤였고 참호 내에서 제대로 된 위생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부상과 관계없이 발이 썩어서 절단해야 하는 병사들도 매우 많았다고 한다. 후방으로 빠지기 위해서 일부러 참호 밖으로 발이나 손 등 신체 일부를 내밀어 저격 당한 뒤 후방으로 이송되는 걸 노리는 병사들도 많았다고 한다.
1차 세계대전은 드라마틱한 전투와 영웅들이 존재하는 2차 세계대전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지만 진정 전쟁의 참상을 더 극명히 느끼게 한다.
이 작품은 시작하고 끝날때까지 컷이 없다. 단 한번, 주인공이 잠시 의식을 잃었을 때 있긴 하지만 이는 컷이라기 보단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나누어 놓은 느낌이 강하다. 이런 형태의 컷이 없는 롱테이크 촬영 기법은 사뭇 관객들에게 지루한 느낌을 줄수 있어 호불호가 강한 기법이지만, 1917에서는 예외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촬영 기법이 줄수있는 지루한 느낌을 화자의 상황이 완벽하게 커버해주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터,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적의 총알 혹은 폭격, 조금이라도 지체되면 본인의 형을 비롯해 목숨을 잃게 될 1,600명의 아군, 반드시 완수해야 하는 절막한 임무 등등이 롱테이크가 주는 지루함을 싹 걷어내준다. 그리고 몰입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려 준다.
개인적으로 초반에 아군 진지를 벗어나 독일군 초소로 잠입하는 장면까지의 장면은 정말 현대 전쟁영화 명장면 중 세손가락 안에는 넣어야 한다고 본다(물론 1순위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오마하 해변 상륙 작전 씬이다).
롱테이크라는 기법을 적극 활용하여 주인공들의 조마조마한 심리 상태와 전쟁의 참상을 정말 여과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지가 절단되어 죽은 시체, 방치되어 쥐가 파먹고 있는 시체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철조망, 폭격으로 인해 생긴 구덩이, 그곳에 고인 물과 둥둥 떠있는 시체들까지.
그리고 작중 주요 인물은 블레이크 일병의 사망씬에서도 개인적으로 놀랐던게 보통 영화를 보면 칼에 맞거나 총에 맞아도 부축을 받아 어느 정도는 멀쩡하게 움직이다 기력이 다해 멋진 폼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는 달랐다.
어떻게든 구하고 싶은 마음에 부축을 해주려 하는데도 아파서 도저히 움직일 수 없다며 쌍욕을 해대며 제발 그만하라고 애걸하는 모습, 정말 스크린 밖으로 고통이 튀어 나올 것 같은 리얼한 연기력, 거의 사망 직전에서는 피가 빠져 얼굴 색이 파랗게 질리는 것까지 정말 소름끼칠 정도로 한 인간의 사망을 디테일하게, 여과 없이 그려내었다.
덩케르크를 보면서도 느낀 점인데 최근의 전쟁영화 트렌드는 영웅적인 면모의 부각이 아닌 병사들의 인간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모습인 것 같다. 본작에서도 주인공인 스코필드 일병은 낮잠을 자다가 엉겁결에 친구 블레이크를 따라 나섰다가 일생일대의 임무에 투입되게 된다.
처음에 임무에 나서는 내내 시종일관 툴툴대며, 독일군의 부비트랩으로 인해 죽다 살아난 뒤에는 동료에게 왜 하필 나를 데리고 왔냐면서 욕지거리까지 한다.
이런 모습들 외에도 주인공인 스코필드는 이전 전투에서 얻은 훈장을 와인 한병에 교환할 정도로 전쟁에 대해 시니컬한 인물이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볼 때 주인공이나 악당이 급격하게 각성할 경우, 그 계기가 나에게 공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한다.
그를 각성하게 한 것, 목숨을 잃을 온갖 위기를 뚫고 임무를 완수하여 전우들의 생명을 구할 영웅으로 만든 계기는 훈장도, 장군의 명령도 아닌 친애하던 전우의 죽음, 도피 과정에서 우연히 만난 프랑스 여인, 그 여인이 데리고 있던 한 갓난 아이에게 노래를 불러주던 시간이었다.
주인공 스코필드 일병은 죽음의 위기를 넘기고 대대장에게 작전 취소 명령서를 전달하며 1,600여 명의 생명을 구한다. 하지만 대대장은 전쟁을 끝낼 기회를 놓쳤다며 짜증을 내고,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이 꺼지라는 말을 내뱉는다.
반대로 블레이크 일병의 형, 블레이크 중위에게는 가장 소중한 본인의 동생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블레이크 중위는 눈물을 삼키며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대대급 병력의 생명을 구한 위대한 일에 대한 대답은 "꺼져라" 이고, 가장 소중한 사람의 사망 소식에 대한 대답은 "고맙다"라는 점이 참 전쟁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고 느꼈다.
코로나 확진 자가 격리로 인해 나는 이 영화를 골방에서 TV도 아니고 컴퓨터로, 그것도 헤드셋을 끼고 봐야만 했다. 위에서 따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이 영화는 OST도 끝내준다. 아카데미에서 촬영상, 음향효과상, 시각효과상을 공짜로 줬을 리는 없을 것이다. 반드시 극장에서 봐야 할 영화인데 극장에 갈 수 없는 시기에 개봉 시기를 잡은 것은 개인적으로 너무 아쉽다.
인생 영화라고 생각하는 터미네이터2나 다크나이트 같은 작품들이 극장 재개봉을 해도 나는 극장에서 다시 본 적은 없는데, 1917은 극장에서 재개봉을 하는 날이 온다면 개인적으로 꼭 극장에 가서 "경험" 해보고 싶다.